로마 한달살기 #02 : 로마의 일상
예전에 로마에서 지낼 때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머물렀던 기억이 납니다. 어디로 움직이든 지하철이나 기차, 버스를 타야 했는데 그 모든 교통편이 거쳐 가는 곳이 테르미니 역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두 번 고민하지 않고 테르미니 역 근처의 저렴한 숙소를 잡았습니다.
17년 만에 다시 마주한 로마 테르미니 역
막상 도착하고 보니 역에서 겨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더군요. 숙소로 걸어가는 길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사실 테르미니 역조차 낯설더군요. 역 내부가 예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것 같고, 기억에 없는 온갖 매장들이 역 안에 줄지어 들어서 있었습니다. 역 앞 풍경도 새로웠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오래된 건물들만큼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딱히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주변 맛집을 탐방하고 더운 낮 시간을 피해 하루에 한두 곳 정도만 관광지를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유명한 유적지들이야 예전에도 가보긴 했지만, 잠깐 머물며 바쁘게 돌아다녔을 때와 한 달을 지내며 천천히 둘러보는 것은 같은 장소를 보아도 느낌이 확실히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유적지 자체를 넘어 그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더군요.
예전 여행에서 남은 기억이라곤 콜로세움, 바티칸, 트레비 분수, 포로 로마노, 판테온, 스페인 광장, 나보나 광장처럼 굵직한 이름들뿐이었습니다. 정작 그 점과 점 사이의 기억은 비어 있었죠. 실제로 그때 남겨두었던 여행 기록을 다시 읽어보아도 유적지 사이를 이동하던 길이나 소소한 거리 풍경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더군요.
반면 이번 로마 한달살기에서는 유명한 유적지들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골목 풍경, 구석구석 식당을 찾아다니며 마주친 거리, 그리고 여유롭게 다녀온 근교의 아름다움까지 훨씬 다채로운 로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숙소 근처에서 먹은 첫날 저녁
한 달 동안 지낼 예정이었기에 첫날부터 식당을 어렵게 고르진 않았습니다. 어차피 머무는 동안 숙소 근처의 웬만한 식당은 다 한 번씩 가보게 될 것 같았거든요. 첫날엔 동네를 슬쩍 둘러보다 적당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볍게 시킨 파스타와 홍합 수프, 그리고 피자까지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예전에도 로마에서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 맛이 없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더운 날 자주 찾았던 차가운 에스프레소, Caffè Freddo
이탈리아 하면 파스타와 피자도 유명하지만,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게 커피죠. 동네 작은 식당 어디를 가더라도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뽑아줍니다. 맛은 말할 것도 없고요. 원두의 차이인지 바리스타의 머신 세팅 실력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딜 가나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희가 가장 즐겨 마셨던 건 테르미니 역 앞 작은 카페에서 팔던 카페 프레도였습니다. 차갑게 식힌 에스프레소인데, 이걸 파는 카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다른 동네에서는 자주 맛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여름에도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더 즐겨 마시니까요.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음료는 산 베네데토 복숭아 아이스티(San Benedetto Pesca)였습니다. 동네 작은 마트에서도 흔히 파는데, 흔한 립톤 아이스티와는 또 묘하게 다른 맛이라 참 맛있더군요. 6월의 로마가 워낙 무더웠다 보니 시원하고 달콤한 복숭아 아이스티가 유독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 아이들은 식당에 갈 때마다 늘 이걸 찾았습니다.
콜로세움 &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 내부
콜로세움 밖 풍경
충분히 시간을 할애해서 둘러본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는 역시 훌륭했습니다. 콜로세움 구석구석을 걸어보고, 예전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던 포로 로마노 역시 무더운 날씨였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구경했습니다.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보며
아이들과 로마 시대 이야기를 나누고 안내 책자에 적힌 설명도 함께 읽어가며 돌아보았는데, 다음 일정에 쫓겨 서둘러 봐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바라보니 예전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더군요. 유적지 바로 앞 식당에서 먹은 점심은 이번 이탈리아 여행을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맛이 없긴 했습니다. 역시 어느 나라든 대형 관광지 바로 앞 식당은 피하는 게 상책인 듯합니다.
트레비 분수 & 판테온, 그리고 스페인 광장
사실 로마 도심의 주요 유적지들은 대부분 걸어 다닐 만한 거리에 몰려 있어서 구역을 딱 잘라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에 많아야 두세 곳을 슬슬 둘러보는 식이다 보니 비슷한 골목을 여러 번 오가곤 했지요. 트레비 분수와 판테온도 꽤 가까이 붙어 있어서 트레비 분수를 구경한 뒤 바로 판테온으로 걸어가기 좋습니다.
판테온은 예전엔 그냥 줄을 잠깐 서서 무료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미리 입장권을 예약하고 가야 하더군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올리티(Giolitti) 젤라또
근처 Giolitti에서 젤라또도 먹고 커피도 한잔 마시며 예약 시간에 맞춰 판테온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판테온
실제로 뻥 뚫린 돔 천장(오쿨루스)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새삼 신기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걸 보려고 줄 서서 기다린 시간이 살짝 아깝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판테온 내부보다 오히려 바깥에서 거대한 기둥과 외벽을 바라보는 게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판테온 근처의 활기찬 골목
근처 나보나 광장은 2025년 가톨릭 희년을 앞두고 분수대 보수 공사가 한창이라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사실 나보나 광장뿐만 아니라 로마 시내 곳곳의 유적지와 광장들이 희년 맞이 대대적인 단장을 하고 있어서 시기를 조금 잘못 잡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진짜 희년인 2025년에 왔더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인파에 치여 훨씬 힘들었을 것 같네요.
스페인 광장 주변을 가득 메운 인파
공사 중이든 아니든 엄청난 인파는 스페인 광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페인 광장 분수대에서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광장 분수대 주변에 모여 앉아 열기를 식히고 있었고, 광장 자체만 놓고 보면 로마의 다른 광장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스페인 광장에서 핀초 언덕과 포폴로 광장 쪽으로 걸어 올라가며 내려다본 로마 시내의 풍경만큼은 충분히 발품을 팔 가치가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로마의 지붕들과 성 베드로 대성당 돔
트라스테베레 (Trastevere)
거대한 고대 유적지는 아니지만, 테베레강 건너편의 트라스테베레는 무척 마음에 들었던 동네입니다. 마치 베네치아의 좁은 뒷골목을 걷는 것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면서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기자기한 풍경에 자꾸 눈길이 가는 지역이었습니다.
트라스테베레 골목길 풍경
골목을 따라 걷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러 쉬기도 하고, 오래된 성당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외에도 한 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로마 도심 구석구석을 산책하듯 누볐는데, 그 많은 풍경을 사진 몇 장으로 다 담기는 어렵겠네요. 다만 확실한 건, 로마 안에서는 어느 유적지나 골목을 찾아가든 실망하거나 들인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수천 년 된 유적이 도시 곳곳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널려 있고, 또 그것을 지금까지 일상의 일부로 잘 보존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볼 때마다 놀라웠습니다.
베네치아 광장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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