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한달살기 #03 : 근교 나들이 (오르비에토, 아시시)
로마에 지내면서 가끔 근교로 짧은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처음부터 딱히 어디를 가겠다고 목표를 정해둔 건 아니었고, 예전에 가보았던 티볼리(Tivoli)의 분수 정원(빌라 데스테)처럼 로마에서 하루 안에 가볍게 다녀올 만한 곳들을 둘러보려고 했죠.
티볼리는 기차로 가기엔 환승이 번거로워 버스를 타고 출발했는데, 하필 가는 길에 갑자기 복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정작 티볼리는 구경도 못 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 아쉽습니다.
반면 각기 다른 날에 다녀온 오르비에토(Orvieto)와 아시시(Assisi)는 둘 다 움브리아 지방의 중세 언덕 위 마을이라는 점에서 분위기가 꽤 닮아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기차로 오르비에토까지는 한 시간 반 남짓 걸리고, 아시시는 조금 더 북쪽에 떨어져 있어 세시간~네시간 가까이 걸립니다. 기차역에 내린 뒤 곧바로 마을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역에서 푸니쿨라나 마을버스를 한 번 더 타고 가파른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점도 똑같았습니다.
숙소가 테르미니 역 바로 근처라 기차를 타러 오가는 길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Trenitalia 모바일 앱으로 기차표를 바로 예매할 수 있어서 역 키오스크 앞에서 줄을 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요.
절벽 위의 요새 도시, 오르비에토
오르비에토의 아기자기한 중세 골목길
오르비에토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다른 소도시들을 들를 때도 늘 느낀 것이지만, 수백 년 전의 아기자기하고 오래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다니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거기에 더해 오르비에토와 아시시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지형 덕분에, 골목과 건물 사이사이로 탁 트인 움브리아 평원이 멀리 내려다보여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각별합니다.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이는 움브리아의 초록빛 구릉
오르비에토 골목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 마을의 상징인 대성당과 지하 도시 입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절벽 아래로 거미줄처럼 뚫려 있는 오르비에토 지하 도시
오르비에토가 자리한 절벽은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지형이라, 고대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이 절벽 아래에 무려 1,200개가 넘는 동굴과 지하 터널을 파서 저장고와 피난처로 썼다고 합니다. 이 지하 공간은 가이드 투어를 예약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좁은 땅굴을 따라 구석구석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특히 전쟁이나 포위 공격을 당했을 때 절벽 위에서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깊숙이 파 내려간 우물의 구조와 깊이, 그리고 비상시 식량으로 쓰려고 지하 동굴 벽면에 수백 개의 구멍을 뚫어 비둘기를 키웠던 공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작은 언덕 마을에 지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웅장한 오르비에토 대성당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이 작은 언덕 마을에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당이 지어졌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13세기 말 교황청과도 인연이 깊었던 도시라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중세 신정합일 시대의 종교적 열정이 작은 소도시에까지 이토록 압도적인 건축물을 남겼다는 게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더군요.
보통 오르비에토에 오는 김에 근처의 '천공의 성' 치비타 디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까지 묶어서 다녀오곤 하는데, 저희는 둘째가 오르비에토에서 신나게 놀다가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그곳까지 들를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흔적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흉터로 남아 있네요.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로운 언덕, 아시시
기차역에서 올려다본 언덕 위의 아시시
아시시는 오르비에토보다 규모가 한결 더 큰 마을입니다.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을 가로막아 천연 요새 같은 느낌을 주는 오르비에토와 달리, 아시시는 수바시오 산 중턱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길게 자리 잡은 언덕 마을의 느낌이 더 강합니다.
아시시의 중세 석조 골목길
그래도 골목골목 이어지는 중세 석조 건물들의 아기자기한 정취는 오르비에토 못지않더군요. 마을 규모가 더 큰 만큼 성당도, 광장도 훨씬 넓었고 음식점이나 둘러볼 만한 포인트도 더 많았습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상부 성당 전경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인 아시시에서는 마을 곳곳에서 그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을 서쪽 끝에 자리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상부 성당과 하부 성당이 위아래 2층으로 겹쳐 지어진 독특한 구조인데, 하부 성당 아래 지하 묘소에 안치된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도 직접 참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종교적 의미를 다 차치하더라도, 아시시라는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 그 자체가 참 만족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래도 화려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대도시를 더 좋아하지만, 저와 아내는 이렇게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여유롭게 걸으며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군요.
아시시의 고즈넉한 돌계단 골목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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