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코스트 오토바이 여행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출발해 꽉 찬 1박 2일로 캘리포니아의 숨은 비경, 로스트 코스트(Lost Coast)를 바이크로 달리고 왔습니다.
캘리포니아를 남북으로 잇는 유명한 1번 해안 고속도로가 유독 이 북부 해안 구간에서만 뚝 끊깁니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험준한 킹스 레인지(King Range) 산맥에 가로막혀 결국 도로 건설을 포기하고 내륙(101번)으로 크게 우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1930년대에 인구 숫자가 크게 줄어 이름조차 '잃어버린 해안(Lost Coast)'으로 불리는 캘리포니아 최후의 해안가 오지입니다.
윌리츠(Willits)에서 시작해 숲길 임도로 포트 브래그(Fort Bragg)를 넘고, 해안 절벽을 따라 유살 비치(Usal Beach)를 거쳐 쉘터 코브(Shelter Cove)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킹스 레인지의 험로를 뚫고 매톨 비치(Mattole Beach)와 푼타 고다(Punta Gorda)까지 찍고 돌아오는 코스였습니다.
Lost Coast Motorcycle Trip 2023
계획
로스트 코스트는 평소 오버랜딩 영상이나 어드벤처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보며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였습니다. 원래는 4륜 구동 트럭으로 가볼 생각이었는데, 바이크 동호회 동생이 2022년에 어드벤처 바이크로 미리 답사를 다녀오더니 "여긴 무조건 오토바이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하더군요. 그렇게 의기투합해 라이딩 계획이 잡혔습니다.
출전 라인업은 꽤나 다채로웠습니다. 제 KTM 690 Enduro R을 필두로, 동생들의 야마하 테네레 700과 BMW R1250GS, 그리고 오프로드는 이번이 처음인 형님의 BMW R9T 스크램블러까지 총 네 대였습니다. 경량 엔듀로부터 거대한 대륙횡단용 빅보어 듀얼, 그리고 클래식 스크램블러까지, 저마다 성격이 판이한 바이크들이 한 팀으로 떠나는 흥미진진한 조합이었습니다.
새벽같이 출발할 예정이라 전날 밤 트럭 베드 위와 트레일러에 미리 단단히 결속해 둔 바이크들
Sherwood Rd
여정의 베이스캠프는 윌리츠(Willits)였습니다. 근처 여관에 양해를 구하고 트럭과 트레일러를 주차해 둔 뒤, 설레는 마음으로 바이크를 내렸습니다. 함께한 형님이 흙길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워밍업 삼아 비교적 수월한 셔우드 로드(Sherwood Rd)를 타고 산을 넘어 포트 브래그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의 흙길 주행이었는지 저 역시 초반부터 진땀을 뺐습니다. 길 위에 쓰러진 통나무를 넘다가 바이크 하부가 덜컥 걸리기도 하고, 젖은 흙길 위에서 앞뒤 바퀴가 미끌거리며 시작부터 우왕좌왕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울창한 Sherwood Rd 숲길을 넘다가 잠시 숨을 고르며 세워둔 690
길 자체는 울창한 숲속을 관통하는 전형적인 비포장 임도라 무난한 편이었습니다. 만약 돌아오는 귀환길이 101번 고속도로가 아니었다면, 다음번에는 아예 포트 브래그 쪽에서부터 라이딩을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Fort Bragg -> Usal Rd
정오 무렵, 태평양 바닷가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항구 마을 포트 브래그에 도착했습니다. 노요 하버(Noyo Harbor) 다리 밑에 위치한 유명한 로컬 맛집 'Noyo Fish Company'에 들러 버거와 프라이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1번 해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Noyo Harbor의 Noyo Fish Company에서 맛본 버거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따라 달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상쾌했습니다.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가는 짙은 해무나 궂은 날씨가 잦기로 유명한데, 이날은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파란 하늘이 열려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절벽 가에 바이크를 멈춰 세우고 드론을 띄워 파도와 절경을 카메라에 담은 뒤, 본격적인 오프로드의 관문인 Usal Rd 초입으로 접어들었습니다.
Usal Beach
원래 계획은 Usal Rd를 타고 Usal Beach를 거쳐, 비포장 해안 산길을 따라 그대로 Shelter Cove까지 한 번에 북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겨울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Usal 해변 북쪽 구간의 도로가 유실되어 통제된 상태였습니다. 아쉽지만 Usal 해변을 둘러보고 다시 1번 도로로 빠져나와 101번 고속도로를 우회해 Shelter Cove로 가기로 경로를 수정했습니다.
특유의 짙은 검은 모래와 거친 태평양 파도, 절벽이 어우러진 Usal Beach
해변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급한 한 구간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탄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경사로에서 제 짧은 다리와 690의 사악한 시트고가 사단을 냈습니다. 한마디로 까치발로도 땅이 닿지 않아 제자리에서 풀썩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멋쩍게 웃으며 바이크를 일으켜 세우고 마주한 Usal Beach는, 특유의 검은 모래사장과 거칠게 부서지는 태평양 파도가 어우러져 오지 해변다운 서늘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Shelter Cove
101번 고속도로를 타고 쉘터 코브로 향하는 포장도로 구간도 뜻밖의 큰 재미를 주었습니다. 울창한 숲길을 고속으로 시원하게 질주하다가, 101번을 벗어나 굽이굽이 이어지는 좁은 와인딩 로드를 타고 킹스 레인지 산맥을 넘자, 절벽 아래 숨겨진 보석 같은 작은 해안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로 쉘터 코브였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수십 년을 산 현지인들 중에서도 쉘터 코브를 직접 와봤거나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편도로만 5시간 이상 걸리는 고립된 지리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마주한 풍경에 비해 너무나 저평가되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무렵 마을에 도착해, 서둘러 숙소에 짐을 풀고 해안 활주로 바로 옆에 자리한 Gyppo Ale Mill로 향했습니다. 고립된 마을이라 저녁을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들어간 곳이었는데, 이것이 이번 여행 최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Shelter Cove 비행장 활주로와 바다가 바로 맞닿아 있는 Gyppo Ale Mill 야외 테라스
야외 패티오 한가운데 타오르는 모닥불, 신선한 수제 맥주와 맛깔스러운 음식, 잔잔하게 흐르는 라이브 통기타 음악, 그리고 활주로 너머 태평양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일몰까지. 하루 동안 온몸에 쌓인 흙먼지와 피로를 한순간에 녹여내 주는 황홀한 밤이었습니다. 이때의 강렬한 여운이 마음 깊이 남아, 그해 가을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이곳을 찾았고, 훗날 이 여정을 함께했던 형님과 직접 경비행기를 몰고 저 활주로에 내려앉는 또 다른 낭만적인 추억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태평양 수평선 너머로 붉게 타오르며 잊지 못할 장관을 선사한 쉘터 코브의 일몰
Kings Range & Saddle Mountains
둘째 날, 이번 여정의 본격적인 하이라이트 오프로드를 달리는 날입니다. 쉘터 코브에서 허니듀(Honeydew)까지 킹스 레인지 국립보존지구(King Range National Conservation Area)를 관통하는 킹스 피크 로드(Kings Peak Rd)를 타고 북상합니다. 메인 임도는 비교적 평탄한 파이어로드였지만, 우리는 조금 더 모험적인 코스를 위해 중간 샛길인 새들 마운틴(Saddle Mountain) 방면으로 바이크를 틀었습니다.
이곳은 폭이 좁고 거친 너덜지대와 급경사가 이어지는 진짜배기 험로였습니다. 가벼운 690이야 거침없이 치고 나갔지만, 온로드 지향에 무게가 있는 R9T 스크램블러를 타던 형님은 돌밭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며 사투를 벌였습니다. 특히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에서는 바이크가 중심을 잃고 몇 번이나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오프로드 라이딩이 낯선 데다 차체까지 무거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함께 산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형님은 다시는 오프로드 라이딩을 안하고 계시긴 합니다 ㅎㅎ)
Kings Range 고지대 능선 임도에서 내려다본 첩첩산중의 웅장한 파노라마
온몸이 땀으로 젖고 녹초가 되어 산을 빠져나오자 작은 산골 마을 허니듀(Honeydew)가 반겨주었습니다. 그늘에서 숨을 고르며 마신 시원한 물 한 모금은 꿀맛 같았습니다. 여기서부터 매톨 비치(Mattole Beach)까지는 한동안 평화로운 포장도로가 이어집니다. 매톨 강(Mattole River) 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양옆으로 목가적인 전원 풍경과 푸른 초원이 번갈아 펼쳐지며 지친 라이더들의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씻어주었습니다.
Mattole Beach & Punta Gorda
그렇게 강줄기를 따라 달려 마침내 매톨 비치(Mattole Beach)에 닿았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비포장 흙길을 따라 산을 타고 오르면 로스트 코스트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경, 푼타 고다(Punta Gorda)로 이어집니다. 단언컨대 이번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던 하이라이트 구간이었습니다.
Mattole Beach의 원시적인 해안선과 평화로운 풍경
가파른 흙길을 타고 산을 올라갈수록 발아래로 매톨 비치의 해안선과 함께 망망대해 태평양이 장엄하게 펼쳐졌습니다. 북부 해안 특유의 해무가 전혀 없는 완벽한 날씨와 쏟아지는 햇볕 덕분에, 바다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믿을 수 없을 만큼 짙고 깊은 코발트블루 빛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언덕을 오르는 내내 일행 모두 헬멧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멈추지 못했습니다.
언덕길을 오르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 눈이 시리도록 푸른 태평양
능선을 완전히 넘자, 푼타 고다 등대로 향하는 완만한 해안 평원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성인 키만큼 훌쩍 자란 황금빛 갈대밭 사이로 한 줄기 오솔길이 뻗어 있고, 그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갈대밭을 넘실거리며 지나갔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숲을 헤치며 바다를 향해 바이크로 달리는 그 순간은, 마치 현실을 벗어나 꿈 속에 와 있는 듯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등대 바로 코앞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자갈밭 길은 경사가 험해 다 함께 내려가지 못하고 동생 한 명만 대표로 다녀왔는데, 훗날 액션캠 영상을 돌려보며 조금 무리해서라도 끝까지 내려가 볼 걸 그랬다는 짙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음번에 트럭을 타고 오게 된다면 반드시 저 등대 끝까지 발을 디뎌보리라 다짐했습니다.
바닷바람에 넘실거리는 높은 갈대밭 사이를 달리는 잊지 못할 환상의 트레일
참고로 이때의 아쉬움 때문에 가을에 가족들과 픽업트럭을 타고 이곳을 다시 찾았는데, 11월 초에 가니 푼타 고다 등대로 들어가는 관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연 보호와 우기 안전을 위해 매년 4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만 길이 개방되는 곳이더군요. 계절의 문턱에 걸려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아쉬운 기억도 지금은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습니다.
Redwoods
원래의 전체 일정 계획은 북쪽 펀데일(Ferndale)까지 계속 치고 올라가 블랙 샌드 비치(Black Sand Beach)를 둘러보고, 유명한 거목 숲길인 Avenue of the Giants를 관통해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험로와 절경 속에서 온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에 일행 모두 기분 좋은 탈진 상태였고, 시간도 어느덧 늦은 오후를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푼타 고다에서 마주한 압도적인 장관만으로도 이미 이번 여행의 만족감이 200%를 채우고 넘쳤기에, 무리해서 일정을 고집하지 않고 곧장 윌리츠로 복귀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모험을 완성하는 것은 때로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훔볼트 레드우드 주립공원(Humboldt Redwoods State Park)을 가로지르며 수천 년 세월을 버텨온 거대한 고목 숲의 서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101번 고속도로 합류 지점에 다다라서는 장엄하게 흐르는 일 강(Eel River)의 물줄기를 감상하며 남쪽으로 속도를 높였습니다.
Humboldt Redwoods 주립공원에서 마주한 거대한 고목 아래서
나란히 달리는 구 도로인 Avenue of Giants로 따로 빠지지는 않았지만, 101번 본선 위에서도 키 높은 레드우드 나무들 사이로 황금빛 노을이 뉘엿뉘엿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온몸은 뻐근했지만 (특히 엉덩이가 불이 날 정도) 가슴속은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찬 귀환길이었습니다.
마무리
오프로드와 어드벤처 라이딩을 사랑하는 라이더에게 캘리포니아의 로스트 코스트는 그야말로 축복 같은 코스입니다.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난이도 높은 흙길과 돌밭, 울창한 원시림,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태평양의 장관까지, 모터사이클 모험의 모든 요소가 농밀하게 응축되어 있습니다.
여행을 마치며 일행들과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 데스밸리(Death Valley)를 바이크로 달렸을 때 메마른 대자연의 광활함과 고독에 압도당했다면, 이곳 로스트 코스트에서는 거친 바다와 울창한 숲이 빚어내는 캘리포니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서로 극명하게 다른 매력을 지닌 두 개의 성지입니다.
푼타 고다 가는 갈대밭 길에 우스갯소리로 "캘리포니아 바이크 투어 업체를 차려서 한국 라이더들을 로스트 코스트로 안내하면 대박이 나지 않겠느냐"는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버는 것이지만,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감동과 모험을 선물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다시 그 거친 흙길과 갈대밭 사이로 바이크의 시동을 걸고 싶어지는, 진정한 '잃어버린 해안'의 라이딩 기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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